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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공

제목 없음

 

 ㅣ 가선대부동지충추부사 송재공 묘갈명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松齋公墓碣銘)

 

맹자가 말씀하시기를 “문장으로써 말할 수 있는 자는 성인의 무리다.”하였으니, 내가 함안조씨의 문중에 가히 이를 보겠도다. 광해조 때 정인홍이 오로지 권세를 믿고 사설(邪說)을 만들어 퇴계 선생을 배척하니 수놈이 부르면 암놈이 화답하듯이 그 무리들이 성해졌다. 이에 간송 조공이 개연히 탄식하고 글을 보내어 준엄하게 꾸짖으니 논란이 분분하였다. 그의 종형 송재공이 종제를 칭찬하고 일문이 약속하여 의를 고수하면서 아첨한 사람의 화를 헤아리지 않고 선현의 학문을 보호하니, 어찌 장하지 않겠는가?

송재 묘도에 아직 비를 세우지 못하여 후손들이 비를 세우려 한규로 하여금 내게 명을 청하였다. 그 의기를 느껴 병들고 정신이 혼미하였으나 사양할 수 없었다.

 

공의 휘는 면도요, 자는 경중이며 송재는 호다. 함안조씨는 고려 원윤공 정을 비롯하여  말엽에 전서공 열은 충절을 지켜 호를 금은이라 하고, 이조에 와서 정절공께서는 단종의 충절 신하로 어계 선생이라 일컫는다. 이 분이 5대조요, 증조 의금부경력 연은 김안로의 정사가 못마땅하여 뜻을 지켜 관직에 나가지 아니 하였는데 증 호조참의요, 조는 부사직 증 형조참판 정언이며, 선고 역은 정한강(구) 장여헌(광현) 종유하셨는데 효행으로 증 사재감정 이시다. 어머니는 상주주씨인데 계공랑(啓功郞) 항(恒)의 따님으로 선조 임신년에 공을 낳아 임술년에 제군자감봉사除軍(資監奉事)하시고, 계사년에 수직으로 상호군(上護軍)에 오르셨다가 인해 동지중추부사에 오르시고, 92세인 계묘년 3월 24일에 별세하시었다.

 

함안 마륜 명달밭 자자원에 장사하다. 배위는 함안이씨 증 병조판서 운포(雲圃) 달(達)의 따님으로 6남 1녀를 두셨다.

장자는 함승 차자 함변은 간송당께 출계하고 함번, 함광, 함기, 함설 모두다 문행이 놀랍고 따님은 성산 이원영에게 시집보냈다. 함승은 2남 3녀를 두시고, 함번은 3남 2녀이며, 함광은 4남 2녀요, 함기는 3남 1녀요, 함설은 3남 1녀에 서자 1남이다.

 

공은 사람됨이 효도와 우애로 집안이 심히 아름다웠다. 한강 정문목공을 스승으로 하여 실학에 전심하여 덕 그릇이 숙성하고 국량이 있으니, 사람들이 중히 여기었다. 병자호란 때 동지를 규합하여 창의코자 하다가 성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으며, 베풀어 줌을 좋아하고 빈궁한 사람을 구제함을 힘 닫는 데까지 하였으며 자제 교육을 옳은 방도로 하고 사특한 분간을 엄하게 하여 칼로 베고 쇠를 자르는 듯하니 정인홍을 배척한 한 가지만 보아도 바르고 큰 군자라 할 것이며, 창의는 비록 이루지 못했으나 뜻은 장하였다. 남방(남쪽지방)에서 이를 문채 있게 숭상하고 지금까지 흠앙하여 쇠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명을 쓰노니

파산의 빛나는 집안이며, 명망과 충절 높은 이가 이었도다.

송재여 덕망 또한 장하시다.

사특한 것은 배척하고 정도를 붙들어 쇠한 세상을 깨우시며,

풍천(자연)의 회포로써 세모에 홀로 눈물지우시다.

대의만 밝혀 그 비석에 새겼으니,

아아! 후손된 이는 백대라도 쇠퇴하지 않을 것이다.

비서원승 김영한 지음.

 

 

 ㅣ 송정재기(松汀齋記)

 

자고산이 함주(함안)의 동쪽에 솟아 있고, 꿈틀꿈틀 서쪽으로 달려 수십 보 가량에 마을이 있으니 송정이요, 그곳에 재실을 지으니 송정재다. 오른쪽에 사선대(四仙臺)가 있고 왼쪽에는 봉황정(鳳凰亭)이 있으며, 앞에는 큰 들이 있고 긴 내가 가로 흐른다. 경계가 자못 고요하고 시원하니 곧 중추부사 상호군 조공 송재가 장수(藏修)한 땅이요, 후손들이 강학하던 곳이다.

 

공이 임진란을 당하여 청송으로 피란 가셨다가 평정되어 안인으로 돌아와 사시니 재실과 멀지 아니하였다. 한강 정문목공이 함주의 고을 원으로 계실 때, 공이 찾아뵙고 일찍이 제자가 되어(군자의 학문을 듣게 되었다.) 배우셨다.

공의 종형제 12인 중에 정이 가장 많은 이가 좌랑 벼슬을 한 간송당인데, 간송당이 자식이 없어 공의 둘째 아들 함변을 후사로 주었다,

정인홍이 대북파의 괴수로, 퇴계를 배척하고 남명(조식)추존하여 향교에 올려 제향하고자  하려고, 유생들을 모아 상소를 청하는 우두머리로 간송당을 정하여 위협하였다. 이에 간송당이 의리에 의거하여 엄하게 거절하여 같은 목소리로 이를 배척하였다.

사람들이 정인홍의 세력이 성함에 두려워하여 조공이 위험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인조대왕이 반정하시어 인홍을 굴복시키니 대북파의 사나움이 비로소 그치었다. 이때 영남(함안)에 대북파에 물들지 않은 자는 오직 공의 집안이다. 공이 항상 자손을 훈계하여 말하기를 그릇됨(邪)과 올바름(正) 옳고 그름(是非)을 돌아보지 않고 당만 일삼으면 패하고 망하지 않을 리 없다고 하였다. 공이 충과 후덕을 근본으로 삼아 평생에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고 검소하여 사치하지 아니하고 산수간에 수양하고 명리를 탐내지 아니하며, 오직 교훈을 일삼았다. 매양 정오 경치 좋은 곳에 종족과 어진 이들과 봉명정, 사선대에서 강론하고 시 짓고 술 마시며 풍류를 즐기니, 사람들이 이를 바라보고 신선같다 하였다.

 

한강 선생이 봉산 낙동강의 얕은 물에 목욕할 때, 나아가 강기슭에서 맞이하여 도의를 강론하고 돌아오기도 하고,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해상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방문하여 충성을 장하다고 하였고, 광서 박진영(匡西 朴震英)이 돌아감에 공이 방문하여 그 충성을 만서로 조문하였다.  공의 묘는 재실에서 서북으로 약 십 리에 있다. 매년 시월 재실에서 제수를 장만하여 묘사 지낸지 수백 년이 되었다. 공이 누린 햇수는 92세요, 여섯 아들과 손자가 19명이라 세상 사람들이 복 많은 사람이라 일컬었다.

 

이 재실에서 공부하여 세상에 유명한 사람은 사손(종손) 시옥(時玉), 죽헌 시전(竹軒 時琠), 증손 중추 독성재 가(中樞 獨星齋 榎), 중추 휘(中樞 彙), 양초당 번(養草堂 樊), 현손 동추 영종(同樞, 榮宗), 중추 영방(中樞 榮邦), 외재 영직(畏齋 榮稷), 5세손 조계 중정(釣溪 重靖), 인덕당 중헌(忍德堂 重憲), 7세손 양천재 원(陽川齋 湲)이다. 재실이 오래되어 고칠 곳이 많아 사선대의 언덕에 옮겨 세우니 암석이 층층하고 수목이 울창하여 풍경이 더욱 기이하고 밝고 아름답더라.

임진(1952) 가을 7월 상완 흠재 최병심 지음.

 

 

 ㅣ 송정재 중건 상량문(重建 上樑文)

 

용(龍), 1975(을묘)년 2(병인)월 9일 미시(1~3)에 초석을 놓고, 같은 달 18(을해)일 신시(3~5)에 기둥을 세우고, 같은 달 25(임오)일 오시(11~1)에 상량을 함. 구.

龍 歲在乙卯二月初九日丙寅未時列礎, 同月十八日乙亥申時立柱, 同月二十五日壬午午時上樑 龜

 

 

 ㅣ 송정재 중건기

  

함주의 자고산이 정기를 모아서 서쪽으로 달려 골속이 휑한 한 구역을 이루었으니, 이름하여 송정이라 한다. 들이 평평하게 넓고, 뽕나무와 가래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풍속을 숭상하고 순박하게 힘쓰니 조씨들의 대대로 살던(토지와 집) 곳이다.

 

조씨는 함안을 본으로 하여 고려 원윤 휘 정이 시조이시고, 여러 대를 이어 휘 열은 고려의 공조전서로 호는 금은이고, 이조에 와 어계 선생 휘 여는 공의 5대조이시다. 공의 휘는 면도이시고 호는 송재이신데 중추부 상호군으로 일찍이 문목공이신 한강 선생의 문하에서 인을 하고 자기를 위한 학문을 얻어서 듣게 되었기 때문에 효우가 가정에 돈독하고 신의가 향리에도 믿음을 받았다. 이때 북당(정인홍)이 집정의 지위에 있자 세상의 뜻을 끊고 오직 경서와 사서를 소리 내어 외우고 후생들을 가르쳤다. 그 유풍이 아직도 공경으로 남아 전한다. 살던 집이 해가 오래되어 비가 새고 수명이 다되어 예 살던 곳으로 옮겨 세웠다.

 

주위가 밝고 시원하여 효사(孝思)라고 이를 만하다. 옮긴 것은 선대들이 하신 일을 이어 명백하게 서술한 도리라고 또한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으로서 능히 할 일을 마쳤다고 하지 말고 자질들이 아침저녁으로 이곳에 모여서 공께서 읽으시던 성현의 책을 배우고 행하시던 효우의 도를 닦아서 독실하게 하기를 그만두지 아니 하며, 소나무처럼 무엇이던지 행하여서라도 계승하지 아니함이 없다면, 이것이 전래하여 오는 가문의 명성으로 하여금 실추시키지 아니 하는 것이며, 또한 현판의 이름을 짓게 된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니, 오직 그야말로 힘써야 할 것이다. 나에게 기문을 청한 이는 성준, 만규, 종정씨이고, 이 역사에 있어서 성력을 다한 자는 찬식, 용우, 병규, 용각, 정규, 용소씨 등이다.

1977년 가을 청천 유달준 씀

松汀齋重建記

 

咸州之紫皐山儲精西走谺然作一區者曰松汀田野平廣梓桑密勿而俗尙淳朴趙氏之庄也趙氏本咸安高麗元尹諱鼎爲初祖累傳諱悅麗朝工曹典書號琴隱李朝貞節公漁溪先生諱旅五世孫也公諱勉道號松齋中樞府上護軍早從文穆公寒岡先生之門得聞爲仁由己之學故孝友篤於家庭信義孚於巷里而時則北黨當路故絶意於世惟而諷誦經史訓誨後徒爲事其遺風餘敬尙有傳者而但寓慕一舍年久漏蔽移建于舊居爽塏處可謂孝思之推而亦曰繼述之道也然不以此爲能事之畢使子姪輩惟早與夕聚集於斯學公所讀聖賢之書修公所行孝友之道慥慥不己如松之無不或承則此俾不墜傳來家聲亦不負名扁之義,諸公惟其勉哉請文於余者性俊,滿奎,鍾政也最盡其誠力者贊植,鏞佑,秉奎,鏞閣,貞奎,鏞韶.

丁巳(1977) 菊秋節 菁川 柳達準 謹撰

 

 

 ㅣ 송정재 중건 상량문

 

높은 절의를 후조(後凋,늦게 시듦)에 의탁하고, 면앙(緬仰,산소를 바라봄)하기를 송정의 편액에 걸었네. 깊은 정성을 추모함에 부쳐 이에 선대의 묘를 위한 재실을 짓는다. 경영한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온전하고 아름다움을 다시 본다네.

생각건대 첨지중추부사 송재 조공은 정절공의 유서(遺緖,선대들로부터 물려받은 사업)를 이어받았다. 태어나면서 품성은 충신(忠信)하고 자태는 아름다웠다.

 

한 집안의 족당으로 학문에 매진하여 서로가 자문하여 가장 어울렸던 이는 간송당 종제였다. 옷깃을 끌고 귀의하여 얻은 바 있었던 것은 어진 스승 한강이었으며, 왜난을 피해 청송고을에 가서 가세를 보전하는 계책을 이루었고, 환향하여 안인리에 터전을 잡아 또한 거처의 방도를 얻었다오. 익히고 행한 것은 효우의 상륜이며 갈고 면려한 바는 지절의 탁월함이다. 교활한 인간과 정의를 모독하는 것을 엄하게 배척하며 간송당과 동조하여 서장과 논의는 빠르고 준엄하였다. 흉노족이 나라를 어지럽히자 이를 깊이 분개하여 의거하려했으나 항복의 소식을 듣고 눈물을 쏟았다.

검소하게 살면서도 베풀기를 좋아하여 모두가 혜휼하는 습속을 높이 받들었다. 정도로써 이끌어 자손을 훈계하였으며 사특의 분별은 반드시 엄숙히 하여 말세의 본보기로 삼아 이름난 조상의 어진 손자로서 부끄러움은 없었다.

 

연세는 너끈히 백수를 누릴 것으로 짐작되니 인자는 반드시 상응한 벼슬을 얻는 법 천거로 중추부사로 승계하였네.

수백 년 세월의 흐름을 겪어 아름답게 남긴 자취 이미 너무 오래이나 무리지은 후손들이 나무 가지와 잎처럼 번성하여 유택의 오래 드리움을 숭상하네. 한 구역 수풀 속 옛일을 회상하니 지팡이 짚고 소요한 십리의 구릉에 보이는 듯 눈에 드네. 정령은 오르내려서 봄 이슬 가을 서리를 대비하여 깨끗이 세척하여 제명하고, 겨울에는 글 읽고 여름에는 시를 짓고 또한 많은 사람을 모아 강학하고 송시하여 정성들여 집사해야 한다.

인하여 옛날 같이 편액하여 문미에 거는 것은 장차 사모함을 하기 위함이다. 영세토록 풍운을 따라 내려갈 것이니 어찌 곧 1)긍당긍구(肯堂肯構)하여 일시적인 보고 들음을 빛내리오. 사당의 지킴이 어려움을 어찌 정자를 짓기만 하랴. 계술의 선을 탄식하라는 공자의 말씀에 부끄러움은 없다오.

 이에 짧은 노래 지어 상량에 걸어 두리라.

 어영차 들보를 동으로 가게 하니, 봉황새는 어느 때 이곳에서 울 것인가. 봉은 가고 정자는 비어 일만 홀로 남았으니 고개를 돌려 나의 충정 느낀 것이 몇 번이나 되는가?

 어영차 들보를 남쪽으로 가게 하니. 앞 내는 흘러흘러 낙동강에 합류하네. 당년에 한강이 배를 띄워 노닐던 곳 노 저어 마중하여 더불어 같이 탐색할까.

 어영차 들보를 서쪽으로 가게 하니, 사선대의 물가에는 풀이 무성하네. 시를 읊고 돌아오던 그날의 초연한 뜻을 마음속 깊은 회포를 상상해보니 제창도 가능하리라.

 어영차 들보를 북쪽으로 가게 하니, 외로운 소나무 장구히 2)세한색(歲寒色)을 띠고 있네. 가운데 소장한 정기 홀로 한껏 높으며 천 가지 사특함이 있더라도 어찌 흔들 수 있으랴.

 어영차 들보를 위로 가게 하니, 머리 위의 파란 하늘은 사람이 같이 우러러 보네. 예나 지금이나 하늘이 내린 본성은 다름이 없나니 만백성이 덕을 좋아함을 잊을 수

있으리오.

 어영차 들보를 아래로 내리니, 꽃과 나무의 봄빛이 농막에 연했네. 이로부터 다듬어진 정원에 즐거움이 무르녹을 것이니 문밖의 말과 수레 많음이 무슨 상관있으랴.

 엎드려 원하옵건대 이날 이후로 귀신은 보호하여 기초는 공고하여 티끌은 멀게, 운림은 맑게, 사람들은 각기 윤상에 힘을 써 고가의 풍의를 떨어트리지 아니하고 3)선정(先正)4)추향(趨向)을 배워 사특한 세상의 갈림길을 어지럽게 하지 말기를 빕니다.

 1975년 음 2월 화산 권용현 짓다   

 

松亭齋 重建 上樑文

 

託高節於後凋緬仰揭松之扁寓深誠於追慕仍作望楸之齋旣久經之營之復見完矣美矣惟僉中樞松齋趙公承襲貞節遺緖生稟忠信美姿同堂而征邁相資最切澗松從弟摳衣而依歸有所爰得寒岡賢師避寇而適靑松鄕能全保家之策還鄕而卜安仁里亦得擇處之方服行者孝友之常磨礪焉志節之卓嚴斥憸人蔑正同澗松公而馳書峻論深憤胡虜猾華謀義擧而聞報雪涕儉於躬而好施與咸推惠恤之風率以正而戒子孫必嚴淑慝之辨宜其作衰世楷無愧爲名祖肖孫享壽至期頣可驗仁者必得膺爵陞樞府亦有恩典荐臻累劫閱於星霜縱徽蹟之己邈群裔繁於柯葉尙流澤之長垂追溯當日之藏修益切來裔之興慕一區林巒依舊宛想杖屨逍遙十里丘壟入望如見精靈陟降春秋霜露可備滌濯齊明春夏詩書亦宜羣聚講誦齊衆誠而集事因舊扁而

揭楣盖將于羹于墻溯風韻於永世豈直肯堂肯構耀觀聽於一時嗣守之難豈作星亭歎繼述之善無愧尼父言玆述短謠庸揭脩欐兒郞偉抛梁東鳴鳳何時于此中鳳去亭空名獨在幾多回首感吾衷兒郞偉抛梁之南前川流水洛江參當年岡老泛舟處一棹出迎與共探兒郞偉抛梁之西四仙臺畔草凄凄咏歸當日超然意想像衿懷可與齊兒郞偉抛梁之北孤竹長帶寒色中藏正氣獨峥嶸縱有千邪豈撓得兒郞偉抛梁之上頭上蒼天人共仰古今降衷非爾殊蒸民好德豈能忘兒郞偉抛梁之下花樹春光連野社自是韋園樂意融何關門外多車馬伏願自玆以往神鬼護而基礎鞏囂塵遠而雲林淸人各勵於倫常勿墜古家風義學先正於趨向不亂邪世岐途.

 

乙卯 仲春 花山 權龍鉉 述

 

 

 ㅣ 송정재 주련(柱聯)

 

 좌편엔 봉황대 우편엔 사선대가,            左有鳳鳴右四仙

 아라성 깊은 곳에 은사의 정원일세.         阿羅城裏古林泉

 청운의 장한 뜻은 나라를 걱정하고,         靑雲壯志憂邦國

 늘그막엔 고서 들쳐 성인을 대하였네.       皓首陳篇對聖賢

 심신을 즐거움에 길러 참으로 별계에서,     怡養心神眞別界

 닦고 감춘 물과 돌 자연을 즐기셨네.        修藏水石好風煙

 옛날에 우리 선조 노래하던 장소로서        當年吾祖絃歌地

 봄가을 비이슬 내릴 때 추모하여 느끼리라.  追感春秋雨露天

 -後孫 鍾政-

 

 

 ㅣ 註

 

1) 긍당긍구(肯堂肯構) : 아버지가 업을 시작하고 자식이 이것을 이음.

2) 세한색(歲寒色) : 겨울 추위에 잘 견디는 소나무를 이름.

3) 선정(先正) : 선대의 어진이의 지칭.

4) 추향(趨向) : 대세의 되어가는 형편. 되어가는 방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