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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조정(趙鼎)

 

⊙ 족보의 기록

<갑진보 甲辰譜 1664년>

구보를 살펴보면 신라 원윤이라 이른다.(案舊譜稱新羅元尹)

 

<무오보 戊午譜 1738>

벼슬은 고려대장군 원윤이다. 구보를 살펴보면 신라 원윤이라 일컫고, 집안에 가지고 있는 옛날 기록 중에는 고려의 벼슬이라고 한다.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이는 공으로부터 9대에 이르러 전서공이 이조에 들어와 신라로부터 고려와 조선 5백년 기간 대수는 9세에까지 이르지 않았다. 또 원윤의 관직이 곧 고려와 조선의 관명이다. 곧 공의 관명이 고려와 조선의 관명과 같으므로 의심은 없다. 그러므로 오늘의 기록으로써 고려의 벼슬이라 하는 것은 후일 다시 고찰해보기를 기다릴 뿐이다.

仕高麗大將軍元尹  按舊譜稱新羅元尹家藏舊錄中曰仕於高麗未知孰是而自公九傳而至典書公入李朝自新羅歷麗朝五百年其間代數必不至於九世且元尹之職乃麗朝官名則公之仕於麗朝似無疑故今書以仕高麗以俟後日更考.<戊午譜 1738년>

 

 

⊙ 원윤공 사적

원조의 성은 조(趙)요, 휘는 정(鼎)이요, 자는 우보요, 호는 모당이니, 본래 당나라 사람으로서 신라 경애왕 때 부와 당 두 아우와 더불어 조선으로 건너와 관을 함안조씨로 하였다. 후당 도종(禱宗) 12년 정사 생인데 지혜가 천인을 능가하였고, 신장이 8척이나 되었다.

항상 당나라의 무사안일을 한탄하던 중 동방에 난이 있음을 듣고 경애왕 병술(926)년에 절강 사람 장길과 함께 칼을 짚고 동으로 와서 김선평, 권행,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같은 분들과 의형제를 맺었는데 세상에서 칠형제라 불렀다. 북경에서 처음 여왕을 만나보고 한 팔의 힘이 되어 도와주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왔다. 공은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김선평, 권행은 고창(안동)에서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여왕이 공산 동수(팔공산 대구)에서 포위됐다는 소식을 듣고 네 분이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밤을 낮 삼아 달려가 고창성에 이르러 견원을 격파하니 동경주현(신라 경주지방) 백십 여 성이 항복을 하였다. 공은 대장군 원윤에 개국벽상일등공신에 책봉되고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 태조가 말하기를 조정과 장길은 한나라 조자룡과 장익덕 같은 사람이다. 당나라에서는 불행이지만 나에게는 복이 되었다고 하였다.

고창 <칠현묘>와  동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遠祖元尹公事蹟

諱鼎字禹寶號慕唐本以唐人新羅景哀王時與釜鏜二弟來于朝鮮爲咸安趙氏後唐禱宗十三年丁巳生智過千人身長八尺餘常恨唐國無事忽聞東方有亂景哀王丙戌與浙江人張吉杖釖東與金宣平權幸申崇謙裴玄慶卜智謙結義兄弟世稱七兄弟初見麗王於北京約助一臂之力而歸公起義陜川金宣平權幸起義古昌(字安東)聞麗王被圍於公山桐藪四公率兵三千罔夜倍道至昌城擊破甄萱東京州縣百十餘城皆降伏以公爲大將軍元尹封開國壁上一等功臣賜諡忠蔣麗太祖曰趙鼎張吉卽漢之趙子龍張翼德於唐不幸於我爲福云配享於古昌七賢廟及桐藪忠烈祠.